맨위로가기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헌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면서 치러졌다. 야당은 국민의 직접 선거를 요구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 선거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최규하 권한대행이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최규하는 12월 6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2·12 군사 반란으로 인해 실질적인 권력을 상실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 - 통일주체국민회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출, 국회의원 추천, 헌법 개정안 의결 등의 기능을 수행한 헌법기관이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존속했다.
  •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 -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1978년 5월 18일에 실시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583석을 두고 5,577명이 경쟁하여 78.9%의 투표율을 기록, 현직 대의원의 다수 낙선과 신인 대의원의 대거 당선, 기업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졌으며 유신 체제 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재선을 확정짓고 제10대 국회 전반기 유신정우회 의원 선출 투표로 이어졌다.
  • 최규하 - 대한민국 제4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은 1972년 유신으로 시작하여 박정희 대통령 사망까지 존속하며 유신 헌법을 통해 강력한 대통령 권한, 긴급조치, 민주화 운동 탄압,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등을 특징으로 가진 공화국이다.
  • 최규하 - 최규하 정부
    최규하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로 실권을 상실하고 전두환에게 정권을 넘겨주며 종말을 맞이했다.
  • 단일후보 선거 -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가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유신 체제 하 두 번째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형식적인 절차와 민주주의 원칙 위배로 비판받는 선거이다.
  • 단일후보 선거 - 3·15 부정선거
    3·15 부정선거는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저지른 대규모 부정행위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선거 결과 무효화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
선거 개요
국가대한민국
선거 유형대통령 선거
투표 방식간접 선거 (대의원 투표)
이전 선거제9대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78년
선거일1979년 12월 6일
차기 선거제11대 대통령 선거
차기 선거 연도1980년
선거인단재적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60명
당선 필요 득표수1,281표
후보
최규하
최규하
후보자최규하
소속 정당무소속
득표수2,465
득표율96.29%
투표 결과
1979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결과 지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 결과
최규하2,465표
무효/기권표84표
불참11표
선거 결과
당선자최규하
당선 정당무소속
선거 전 대통령최규하 (권한대행)
선거 전 대통령 소속 정당무소속
선거 후 대통령최규하
선거 후 대통령 소속 정당무소속

2.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 의해 암살(10·26 사건)당했다. 이로 인해 공석이 된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2. 1. 헌법에 따른 권한대행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자 헌법 제48조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1] 신민당 등 야권은 즉시 헌법을 개정하여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1]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현실적인 이유로 일단은 현행 대통령 간접 선거제 헌법대로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 신임 대통령의 관리 하에 대통령 직접 선거제 헌법 개정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1] 결국 현실적인 문제와 여론의 지지로 이전과 같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 선거를 통한 신임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1]

2. 2. 야당의 직선제 요구와 최규하의 대응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헌법 제48조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신민당 등 야권은 헌법을 개정하여 국민 직접 선거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현행 헌법에 따른 대통령 간접 선거제로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이후 새 대통령 관리 하에 대통령 직접 선거제 헌법 개정에 착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결국 현실적인 문제와 여론의 지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거로 신임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2. 3. 최규하 총리의 출마

최규하 권한대행은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이른 시일 내 헌법을 개정"하여 민주적인 새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공약했다.[2] 1979년 12월 3일, 최규하 대통령은 곽상훈 등 대의원 827명의 추천으로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3]

2. 4. 김종필 총재의 불출마

박정희 대통령 암살 전까지 여당이던 민주공화당 내부에선 김종필 총재가 후임 대통령 선거에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이 아닌 민주화 개헌 후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당내 일부 의견과 군부의 견제로 결국 11월 10일 총재 상임고문단 회의를 통해 대선 후보를 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2][4]

3. 선거 제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암살되면서 대통령이 공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간접 선거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다.[1]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0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입후보할 수 있었으며, 대의원 투표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당선될 수 있었다.[1]

4. 재적 대의원

대의원 정원은 2,583석이었으나 5명이 사퇴, 18명이 사망하여 재적 대의원은 2,560명이었다.[5][6] 이 중 해외 체류 2명, 와병 6명, 기타 3명 등의 사유로 총 11명의 대의원이 선거에 불참하였다.[7]

4. 1. 지역별 대의원 현황

대의원 정원은 2,583석이었으나 5명이 사퇴하고 18명이 사망하여 재적 대의원은 2,560명이었다.[5][6] 이 중 부산에서 1명, 서울, 강원, 전북, 전남, 경북, 경남에서 각 2명 등 총 11명의 대의원이 선거에 참석하지 않았다. 불참 사유로는 해외 체류 2명, 와병 6명, 기타 3명이었다.[7]

지역출석불참재적공석정원
서울38823901391
부산14411450145
경기31803181319
강원14821501151
충북13001301131
충남23202323235
전북20022021203
전남30923111312
경북36923718379
경남28422846290
제주27027027
2,549112,560232,583


5. 선거 결과

1979년 12월 1일부터 5일까지 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최규하 후보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였다. 2,560명의 대의원 중 2,46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1]

5. 1. 투표 결과

1979년 12월 6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의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2월 1일부터 5일까지 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최규하 후보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였다.

당선되기 위해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 대의원 과반수의 표를 얻어야 했다. 2,560명의 대의원 중 2,549명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며, 최규하 후보는 이 중 2,46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는 총 유효 투표수의 96.70%에 해당한다. 무효표는 84표, 기권은 11표였다.[1]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 투표 결과
선거인수투표자수투표율당선자득표수득표율무효표기권수
2,560명2,549명99.6%최규하2,465표96.70%84표11명



: 출처: <표 2-3> 간접선거로 치러진 역대 대통령선거의 선거인수 및 투표 상황, <표 2-4> 간접선거로 치러진 역대 대통령선거의 당선인 득표율. 『대한민국 선거사』 제4집, 56~57쪽[1]

6. 이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2월 6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2월 21일 장충체육관에서 정식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취임식 전인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최규하 대통령은 사실상 권력을 잃고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었다.[1]

참조

[1] 서적 Human Rights in Korea 1986
[2] 웹인용 JP “유신 대통령 할 생각 손톱만큼도 없다” 불출마…대통령 되자 달라진 최규하 “지금은 과도정부 아니다” https://www.joongang[...] 2015-09-02
[3]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7
[4] 웹인용 "[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42)10대 의원시절⑤" http://www.hankookil[...] 2002-09-14
[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19
[6]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7
[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